작업 Note

藝文堂
2013. 6.27 중국 텐진

道에 대해서

나는 근 20년을 두 개의 道 가운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하나의 길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가식적인 신념과 변함없이 보이려고 밝은 듯 어두운 내면의 초상이다. 또 하나의 길은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뻔한 길을 가고 있다. 두 길은 어느 것이 끊어져 있는지 또 그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 희망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내 머리 속에 주입하여 입술로 한 없이 중얼거리며 걸어왔다.

그 길이 끊어져 있던지 뻔한 길이던지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한 발짝 걷는 길인지, 이제는 그냥 두 길중에 한 길만 택하고 싶다. 삶이 너무 힘들다. 아니 솔직히 예술이 너무 지친다. 그냥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힘들 텐데 그 길이 불확실성을 띄고 있다면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위치에 있다면 내가 이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정말 어느 길을 가야 하나?

가식적인 신념은 너무 힘들다.

들키고 싶지 않은 길은 화려하지만 그 길을 가야 하는 자신은 너무 싫다.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다막섹 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눈을 뜨고 그 길 위에 새로운 사명을 가졌던 것처럼 나에게도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해방의 길을 찾고 싶다.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균형 잡힌 길은 무엇일까? 이 길은 나 같은 작은 藝術家에게 굉장히 선택하기 어려운 길 인 것 같다.

그냥 쉽게 자연스럽게 부딪치며 그 길을 해쳐가는 좋은 방법은 없는 걸까?

2013. 5월 중국 텐진

‘我想问对自己’

向世俗我的虚伪,向世俗双面的肖像。

我的虚伪和欲望开着花 假装的福开着贪欲花。

越画越觉得‘坐井观天’地感觉。

就像独乐的自己 原因是什么?

井里哲学为了谁的?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세속을 향한 나의 가식, 세속을 향한 두 개의 초상.

나의 가식과 욕망은 꽃으로 피고 가식적인 복은 탐욕의 꽃으로 핀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기분이 든다.

마치 獨樂을 즐기는 자아처럼,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물 안의 철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2012.11 천진에서

여섯 번째 전시를 준비하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 중에 하나가 행복입니다.

그리고 극히 개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행복을 누립니다. 내 자신만 행복하고 즐거우면 된다는 논리로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띄는 행복에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보편적 가치를 넘어 개인의 절대적 가치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우리 모두는 살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공감(共感), 동락(同樂)이라는 단어는 소리 없는 메아리로 들리고 독락(獨樂)이라는 철저한 자기 중심의 사상으로 많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서로간의 교감(交感)이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소통부재의 현상이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소통수단인 상대방과의 대화가 단절되어 소통의 부재로 많은 오해와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정보와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가능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지만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 움집 안에서 자기 초상만 바라보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우리의 삶에 편리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미(人間味)가 점점 더 퇴색되어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교감했던 옛 시대가 더욱 아름답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소통의 부재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며 마치 각자 자기만의 우물 안에서 개구리처럼 자기 주변의 상황만 직시하고 잘못된 식견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자기를 위한 우물을 짖고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위정자들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소통방식과 그리고 거룩한 종교의 이름으로 소통을 거부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세상중심의 종교철학들은 더욱 더 소통의 부재와 독선적인 아집으로 견고한 자기들만의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과제이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제 작업의 시작과 과제 역시 우리사회의 문제와 개인중심의 이기주의를 강력한 메시지 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접근하여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지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제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기 중

심적이며 우물 안에서 철학을 논하는 돼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업은 내 자신부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전체적인 주제는 서로간의 소통과 다같이 행복을 꿈꾸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지만 무거운 주제를 보다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들과 색감을 이용하여 표현 하려고 했습니다. 작은 붓 놀림이지만 작은 변화부터 점진적으로 시작하여 다같이 공감하고 실천해 나간다면 좀 더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 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매 번 붓을 들 때 마다 내 자신에게 묻고는 합니다. 작은 용기가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이제부터 실천하자.

나는 그림이라는 매개로 대중들과 소통하며 공감하며 살겠노라고……

2009.12 천진에서

“그림으로 관객을 고문해서는 안 된다”.

昨今의 많은 예술가들은 문화와 예술이 어느 정도 시점에서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한 많은 고뇌와 실험을 한다.

과거의 자연적이며 정신적인 의경을 중시했던 예술사조에서 복잡 다양한 현재는 세상의 관계에서 더욱 복잡한과 다양한 가운데 개성과 독특함을 요구한다.

이번 나의 작업의 시작은 이러한 문제에서 시작했다고 봐야겠다, 복잡한 우리들 관계 가운데 좀 더 자연스럽고 덜 부담스러운 덜 어려운 누구나 보기 쉬운 단순하고 간단한 즐거움이 있는 예술로 지금의 문화나 현상 등을 관객에게 고문하지 않고 보고만 있어도 즐거움(樂)을 전달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이 표현방식과 사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잘못 해석하게 된다면 많은 고뇌와 자신의 예술철학과 사상으로 응집 되어야 할 신성한 창작의 절대가치와 존재성을 너무 얇게 포장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반면 다른 각도로 접근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의미(意味)의 차이는 분명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존재는 다양한 사회의 울타리 속에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혀있고 나 또한 거미줄의 한 구성원으로서 일정의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의 존재 가치는 관객들에게 현 사회의 현상들을 좀더 다른 각도와 색감으로 상상하고 싶은 세계나 꿈에 대해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 일이다.

방법이나 표현방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작가가 어떻게 소화해서 관객들에게 쉽게 내용물을 공급하는 일이다. 이 문제는 내가 20대 초입부터 끊임없이 고뇌했던 내용인데 그 때는 즐거운 마음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더욱 더 사실에 가깝게 심지어 과장해서 아무 여과장치 없이 직설적으로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영웅처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돌아와 지금의 모습을 보면 이제는 그때의 영웅의 모습은 희미해져 있고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에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이러한 태도는 표현방식에서도 변화를 가져 오는데 좀 더 은유적이며 보다 객관적인 태도로 이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춘추전국시대 장자(莊子)의 ‘해의반박론’ 처럼 옷을 벗고 두 다리를 뻗어 앉아 가장 자연스러운 태도로 세속적인 예법과 속박에서 벗어나 가장 편안한 자세와 정신 상태로 자연스럽게 작업을 임하고 싶다.

(任自然)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세상을 관조하며 현실의 이야기들을 관객들에게 “락” (樂)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많은 관객들에게 내 그림을 통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이라는 “복” 서러운 소식으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이 번 전시의 주된 작업의 태도이다.

이러한 나의 의도는 친자연적이며 은유적이고 전통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작업의 과정이나 소재 등에서 찾아볼 수 있고 작업의 내용물은 갈등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을 담고 복된 세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행복한 선물 이었으면 한다.